우리는 한 평생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는 그 관계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 관계인지, 평생을 같이 갈 수 있는 관계인지 분간하기가 참 어렵다. 정말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람 같았는데 어느 한 순간 그 희생과 헌신이 자기 이득을 위한 조건으로, 거래로 돌변 한다. 그래서 “격어 봐야 안다!”는 말은 진리인 것 같다. 구약성경 잠언을 보면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언 17:17)고 교훈한다. 이 말씀처럼 모든 인간관계의 허실은 다윗처럼 어려움을 당하고 시련을 겪는 현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다윗 왕이 시련을 당할 때 마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괴롭게 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는 길에, 그리고 반군 세력을 진압하고 왕궁으로 환궁하는 과정에서 ‘바르실래’라는 참 좋은 사람,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요단강 동편 길르앗에서 사는 80세의 고령이다. 피난을 위해 다윗 일행이 요단강을 건너 왔을 때 바르실래는 그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아낌없이 제공 한다. 왜 그는 좋은 사람인가? 그가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는 동기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이해관계를 따져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다윗이 왕이기 때문도 아니고, 후일에 보상을 바래서도 아니었다. 이 부분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꿀과 버터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여 목마르겠다 함이더라”(사무엘하 19:29) 무슨 말인가?
바르실래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지금 그냥 배고픈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피곤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왔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계산이 없다. 이해관계도 없다. 그냥 긍휼과 은총만 있을 뿐이다. 이 바르실래는 우리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안’같은 사람이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나그네를 피하여 지나가버린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이 사마리아인은 기꺼이 이 사람을 치료해 주고 돌보와 주었다. 그 동기가 무엇인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였다. 그냥 불쌍해서 자비를 베푼 것이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고 피난 왔던 요단강을 건너 다시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다윗 일행의 요단강 건너는 일을 또한 기꺼이 돕는다. 이런 바르실래에게 다윗은 “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자. 내가 너의 남은 생애를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비르실래로부터 은혜를 입은 다윗 왕으로서는 그의 도움에 무엇인가로 보상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윗의 보상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처럼 나이가 많은데 이제 와서 무슨 영화를 더 보겠다고 왕궁으로 가겠습니까? 내 살던 곳, 내 부모의 묘실 곁에서 죽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왕궁으로 들어가서 왕의 공궤를 받는 일은 왕에게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왕의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종은 지금 다만 왕의 일행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이 일로 내게 무슨 상을 주시려 하십니까?”
요즘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어려움에 쳐한 왕을 도왔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모든 관계를 이해 타산적으로만 생각하는 속물근성에 찌든 우리들에게는 바보 같은 사람의 전형처럼 보인다. 바르실래는 신분을 뛰어 넘고, 이해관계를 떠나 지금 고난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필요를 가진 자 곁에 기꺼이 선한 사마리안처럼 좋은 이웃으로 있기를 원했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바르실래같은 “좋은 사람”을 친구로 둔 다윗은 정말 정말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