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에 보면 ‘욥’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를 가리켜 성경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시련이 찾아 왔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열 명의 자녀들이 한 날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무서운 질병이 찾아 왔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어느 날 갑자기 그에 찾아 왔을 때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가장 가까이서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할 아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 고통을 가중 시키는 것은 자신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이와 같은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절친한 세 명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처음 세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욥을 위로할 수 있을까?”하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처음 가졌던 동기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을 가까이서 주목하는 중에 그들의 마음에는 좋지 못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욥이 저런 저주를 받다니.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까?”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그들은 친구 욥이 고통 받는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자 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인 엘리바스는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욥의 불행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모든 불행은 죄 값으로 온다는 흑백 논리를 폅니다.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욥을 범죄자로 잔인하게 고발합니다.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이라는 사람은 욥의 자녀들의 죽음을 문제 삼습니다. 이 부분은 욥에게 있어서 가장 아픈 부분일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았을 자식들의 죽음에 관한 이유가 친구의 입을 통해 이렇게 설명되어 집니다. “너의 자녀들 열 명이 하루아침에 떼죽음을 당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죄 값을 받은 거야! 알아!” 얼마나 가슴을 후려 파는 소리입니까?
세 번째 친구인 소발은 아예 처음부터 고통 중에 있는 욥을 향해 감정적으로 시비를 겁니다. “너는 왜 이렇게 말이 많으냐? 왜 이렇게 거만하냐? 너 왜 이렇게 무식해! 네가 어찌 알겠어.” 그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모든 것에 도통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깔보며 말로 깐죽거리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욥은 가장 위로가 필요할 때 자신을 위로 한답시고 찾아 온 친구들로부터 결코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위로 받아야 할 때 진정한 위로자가 곁에 없다는 사실 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위로 받고 위로 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해야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위로자는 먼저 고통당하는 자, 슬픔을 당한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백마디 말보다 시간이 흘렀지만 손목시계 들여다보지 않고 시간을 함께 해 주는 사람입니다. 또한 진정한 위로자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거나, 욥의 친구들처럼 함부로 말을 하거나, 단번에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려고 강요하면 결코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고통당하는 자에게 지당한 말, 옳은 말, 정당한 말을 해 주었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위로자는 고통의 이유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고통의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의 잣대로 판단하고, 법의 잣대로 정죄하고, 감정적인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욥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으로 밤을 지세우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무 그들 곁에 “서로 위안이 되는 사람”들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삶에 지쳤을 때나
무너지고 싶을 때 말없이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서로 마음 든든한 사람이 되고
때때로 힘겨운 인생의 무게로
속 마음마저 막막할 때
우리 서로 위안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자.
사랑에는 조건이 따른다지만
우리의 바램은 아주 작은 것으로
더 주고 덜 받음에 섭섭해 말며
문득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먼 회상 속에서도 우리 서로
기억마다 반가운 사람이 되자.
불현듯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때에
서로 마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혼자 견디기엔 한 슬픔이 너무 클 때
언제고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자리에
오랜 약속으로 머물며, 기다리며/ 더없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눈 저리도록
바라보고픈 사람.
우리 서로 끝없이 끝없이
기쁜 사람이 되자."
(‘좋은 생각’ 잡지에 실린 “서로 위안이 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