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배려’(위즈덤 하우스 출판, 한상복 저)라는 책을 흥미 있게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위 ‘사스퍼거’라는 신조어를 등장시킨다. 저자는 이 용어에 대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전혀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며,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이 용어는 결국 남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일종의 심리 발달 장애인 “아스퍼거 신드롬”(Asperger Syndrome)의 확장 개념인 샘이다. ‘사스퍼거’는 ‘소셜 아스퍼거’(Social Asperger) 곧 ‘사회적 아스퍼거’를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우리가 살고 이는 이 사회는 ‘경쟁’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경쟁에서 이기면 무조건 성공자가 되고 지면 처절한 실패자가 된다. 그래서 어쩌면 이기는 경쟁을 위해서 너도 나도 무자비한 ‘사스퍼거’들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들을 성공이라는 명분아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들로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성공은 베푸는 자의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권력도 힘도 돈도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경쟁’이 아닌 ‘배려’를 통해 더 풍족해 지고 행복해짐을 가르쳐야 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 밖에 모르는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계신 분이었다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인 우리들을 한없이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이 땅에 실현시키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역시 배려하는 인격과 삶을 아낌없이 살다 가셨다. 그분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내가 온 것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려 왔다”고 하셨다. 이 예수님을 믿고 그의 인격과 삶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그 분처럼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리라.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유익과 이익을 위해 내 행복 내 유익 내 이익을 희생할 줄 아는 마음이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4)고 하셨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다지도 삭막해 졌는가? 너도 나도 오로지 내 유익 내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눈곱만큼의 무언가를 해 놓고도 생색내고 이름 내고 자기만족을 위해 해야만 하는 위선이 난무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되 그것이 진정한 배려가 되려면 자기중심적이 아닌 상대방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희생이 되어야 한다.
소와 사자가 있었다. 둘은 죽도록 사랑했다. 둘은 결혼하여 살면서 서로를 향해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소가 최선을 다하여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다. 그런데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둘은 서로 마주 앉아 얘기를 했다. 소와 사자는 서로 다툰 끝에 끝내 헤어지고 말았다. 헤어지며 소와 사자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소가 소의 눈으로만 사자를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소를 보면 그들은 겉으로는 같이 살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는 혼자 사는 무인도가 되고 만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이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 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이 되고 만다.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낳게 여기는 마음이다(빌립보서 2:3).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한다(로마서 12:10).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한다(고린도 전서 13:5). 상대방에 대하여 예의를 갖추지 않은 배려는 배려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배려는 배려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는 무례함이 넘쳐 난다. 직장에서, 가정의 가족관계 속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앞에서 소개한 ‘배려’라는 책에서 저자는 무례함이 넘쳐 나는 이 세상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어딜 가나 그런 사람들로 넘쳐나잖아. 식당에서는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뛰어다니고, 부모들은 그런 애들을 방관하고, 지하철 안에서는 큰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교통 정체구간에서는 마구 끼어들고,,, 도무지 남에 대한 생각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남에게 폐를 끼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사람들을 보라고, 그러다가 자기 성질에 겨워 분노하고 폭발하고,,,좌절하지...”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은 베풀 고 나눌 줄 아는 마음이다. 나만 내 가족만 행복하고 만족하면 된다는 생각 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해 질 수 없다. 나만 행복한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진정한 성공일 수 없다. 받기만 하는 행복은 작은 행복이지만 주는 행복은 큰 행복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주는 것이 받은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고 하셨다. 지금도 지구촌 구석 구석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생각의 배려 없이 하루 3끼, 일주일 21끼 식사를 자기 배만 불리기 위해 다 먹어 버리는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닐 것 같다. 구약의 율법에는 추수를 하되 밭의 모퉁이까지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명하고 있다(레위기19:9).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오늘 새삼스럽게 나 자신을 추슬러 본다. 직장 속에서 가정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나의 모습이 ‘사스퍼거’의 모습이 아닌지. 이 세상을 망치고 결국 나를 망치게 할 ‘사스퍼거 신드롬’를 경계해야 할 일이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배려 할 줄 아는 마음, 이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고 진정한 더불어의 성공이 있음을 증명해 내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